2008년 7월 18일
잘 정돈된 공원은
그러나 노숙자들의 천국같았다.
아직도 잠에서 덜 깬 사람.. 아침부터 술잔을 기울이는 사람..
나무사이에 빨래줄을 매고 양말을 빨아 넌 사람..신문 뒤적이는 사람..
지나가기에 민망한 그 길을 다 지나가서야 순교자 현양탑이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서소문 밖 네거리"로 불리던 이곳은 새남터, 당고개와 더불어 조선 왕조의 공식 처형장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 이래 이 처형장에서 순교하신 분은 신원이 확인된 분만도 119명이 넘는다.
이 가운데 44위가 1984년 5월 6일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행사 때 방한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어 단일 순교지로는 성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곳이다.
이곳에서 미사가 있는 것으로 알고 왔으나 아닌가 보다.
서둘러 발길을 중림동 성당으로 돌렸다.
복잡한 시장통을 지나는데 언덕 위를 가리키는 화살표 방향이 보인다.
가뿐 숨을 몰아쉬고 땀을 닦아내며 언덕길을 오르니 가슴뻐근한 하느님의 기운이 느껴졌다.
복잡한 일상에서 눈을 돌려 하느님을 바라보고 또 나를 돌아보라고..
그렇게 거기에 그분이 계셨다.
복잡한 시장통을 지나는데 언덕 위를 가리키는 화살표 방향이 보인다.
가뿐 숨을 몰아쉬고 땀을 닦아내며 언덕길을 오르니 가슴뻐근한 하느님의 기운이 느껴졌다.
복잡한 일상에서 눈을 돌려 하느님을 바라보고 또 나를 돌아보라고..
그렇게 거기에 그분이 계셨다.
성당 앞
중림동 약현 성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1991년 서소순 순교자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기념관 성당 제대
이곳에서의 모든 미사는 '바오로의 해'를 맞이하여 전대사은총을 받는다.
성인들의 유해
성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한 44분의 동료 순교자 성인 성녀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한국교회는 현재 윤지충 바오로를 비롯한 한국교회의 초기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시성을 추진 중이다.
본래 시복시성 청원은 순교자가 순교한 장소가 속한 교구별로 주관하게 되어있으나,
한국교회는 주교회가 통합하여 청원을 추진하기로 뜻을 모았다.
교황청은 2006년 한국교회가 시복시성을 청원한 순교자 124위를 "하느님의 종"으로 공식 선언하였다.
본래 시복시성 청원은 순교자가 순교한 장소가 속한 교구별로 주관하게 되어있으나,
한국교회는 주교회가 통합하여 청원을 추진하기로 뜻을 모았다.
교황청은 2006년 한국교회가 시복시성을 청원한 순교자 124위를 "하느님의 종"으로 공식 선언하였다.
하느님의 종 124위에는 성 정하상 바오로의 부친인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와
주문모 신부께서 입국하신 이후 순교하실 때까지 온갖 노력으로 협조한
강완숙 골롬바를 비롯해
주문모 신부께서 입국하신 이후 순교하실 때까지 온갖 노력으로 협조한
강완숙 골롬바를 비롯해
서소문 순교자 25위가 포함되어 있다.
중림동 약현 성당
오래도록 약현 성당으로 불린 "약현"(약초 고개)이라는 이름은
오늘날 만리동에서 서울역으로 넘어오는 고개가 약초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중림동 성당으로 불리다가
2007년 7월 다시 그 이름을 찾아 "중림동 약현 성당"이 되었다.
오래도록 약현 성당으로 불린 "약현"(약초 고개)이라는 이름은
오늘날 만리동에서 서울역으로 넘어오는 고개가 약초가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행정구역 개편으로 중림동 성당으로 불리다가
2007년 7월 다시 그 이름을 찾아 "중림동 약현 성당"이 되었다.
중림동 약현 성당의 전신은
1887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백 주교가 이승훈 베드로의 집터에 설립한 공소.
그 뒤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 민 주교(뮈텔)는 1891년(고종 28년) 대지 매입,
까미유 두세(한국명 정가미) 신부를 초대 본당 주임으로 임명, 성당 건립의 책임을 맡겼다.
당시 부주교였던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1892년 완공, 1893년 4월 23일 축성되었다.
중림동 약현 성당은 주교좌 명동 성당과 같은 해에 건축이 시작되었으나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명동 성당보다 먼저 완공,
2차례의 사제 서품식이 거행되는 등 일시적으로 주교좌성당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1887년 제7대 조선교구장 블랑 백 주교가 이승훈 베드로의 집터에 설립한 공소.
그 뒤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 민 주교(뮈텔)는 1891년(고종 28년) 대지 매입,
까미유 두세(한국명 정가미) 신부를 초대 본당 주임으로 임명, 성당 건립의 책임을 맡겼다.
당시 부주교였던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1892년 완공, 1893년 4월 23일 축성되었다.
중림동 약현 성당은 주교좌 명동 성당과 같은 해에 건축이 시작되었으나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명동 성당보다 먼저 완공,
2차례의 사제 서품식이 거행되는 등 일시적으로 주교좌성당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벽돌조 성당
삼종기도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는가 보다.
십자가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