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일. 6월 15일(금요일) 아씨시Assisi
올빼미같은 생활에 익숙해진 스테파노가 성지순례하는 내내 새나라의 어린이처럼 일찍 자고(9시~10시)
일찍 일어나(5시~6시), 6시든 7시든 정해진 시간에 아침식사를 챙겨먹는다는 사실이 도무지 신기하다.
우리는 그렇게 아침이면 기운을 회복하여 다시 순례를 시작한다.
<아씨시>
매일아침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 다함께 아침기도를 바치고 신부님의 강복으로 순례를 시작한다.
그리고 그날의 성지가운데 약속된 곳에서 미사를 드리고
순례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버스안에서 저녁기도를 바친다.
로마에서 약200km. 3시간쯤 후 도착.
유럽은 운전기사 전용 칩이 있어 그곳에 버스 운행 시간과 속도 등이 기록된다고 한다.
그래서 고속도로가 밀리지 않아도 절대 과속하지 않아서 편안한 승차감을 느낀다.
가이드가 15년이상을 로마에 살면서 대형 버스사고가 단, 세 번 뿐이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과속운전, 졸음운전, 음주운전 등으로 사고가 빈번한 것을 볼 때
이런 좋은 제도는 하루빨리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성인 한 사람의 이름으로 유명해진 도시.
작고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가 한껏 느껴진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 현대적인 가로등.
* 천사들의성모 마리아 성당
'아시시의 예수' '제2의 그리스도'라 불리는 프란치스코 성인은
1182년 아시시에서 포목상을 하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사의 꿈으로 전쟁에 나가 포로로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중병을 앓고 난 후 회심하게 된다.
어느 날 다미아노 성당에서 기도 중 십자가로부터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라는 소리에 소명을 확신,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고 하느님의 아들입니다."하고 옷을 벗어 아버지와 결별 후 가난한 삶을 살기 시작.
그와 뜻을 같이 하는 12명의 형제와 함께 '작은 형제회'라는 이름으로
교황 이노첸시아 3세에게 수도원 인가를 받고,
성 밖의 버려진 땅에 갈대와 진흙으로 지은움막에 머물렀다.
그 최초의 공동체가 있었던 곳이 포르치운콜라Porziuncola이고,
1569년. 그 위에 세워진 것이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다.
소성당.
예수 성심 대축일이며 사제 성화의 날이다.
신부님께서는 사제 성화의 날을 성지순례 중에 맞게 된 것을 의미있게 받아들이셨다.
특히 프란치스코 정신이 살아있는 아시시에서..
암흑기가 아닌 하느님 중심의 사회였던 중세에서
인간 중심의 사회가 된 근세가 되면서부터 점차 세속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으로 회귀할 것을 강조하셨다.
복도에 있는 프란치스코 상.
새와 동물들과 늘 대화하고 설교를 하였다는 성인.
바구니에 모이가 담겨있어
실제로 비둘기가 드나들고 있다.
평화를 상징하는 흰색 비둘기.
동물과 대화하고 있는 프란치스코 성인 상.
나도 우리 강아지 '담비'와 늘 대화하는데..
가시없는 장미 정원.
프란치스코 성인이 유혹을 이기기 위해 몸을 던졌다는 장미 정원.
그 이후로 이 정원의 장미 나무에는 가시가 돋지 않는다고 한다.
프란치스코 성인의 일화를 설명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이 기도하는 것을 성모님이 예수님께 청하고 있다
성당 제대 위에는
"프란치스코야, 나의 어머니의 청을 받아들여, 너의 기도를 들어주겠다."고 쓰여있다.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은 특히 '아씨시의 용서'라 불리는 전대사로 유명한 곳이다.
1216년. 천사들의 노랫소리에 둘러싸인 성모 마리아가 성 프란치스코에게 나타나 그의 기도를 들어
하느님께 청해 이곳에 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대사를 주도록 하였다.
고풍스럽고 성스럽고 아름다운 회랑
성당 안의 옛 포르치운콜라
성당 입구.
아시시에서는 성당 내부를 찍을 수 없다.
천사들의 성모 마리아 성당을 나와서
성 프란치스코 성당 근처 호텔 식당에서 점심식사.
에피타이저로 파스타를 먹고 나니,
주메뉴로 치킨과 샐러드가 나온다.
후식으로 과일.
피곤하다는 핑계로, 이렇게 양이 많은 것을
나오는대로 하도 잘먹어서 몸이 마구 불어나는 느낌이다.
* 성 프란치스코 성당
성 프란치스코 성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닮은 모습으로 살아간 성인으로
절대 가난으로 공동체를 이끌며 설교로써 활동하다
참회와 묵상의 관상적 삶으로 변화, 1224년 라 베르나 산에서 그리스도의 거룩한 상처인 오상을 받게 된다.
그리고 1226년 10월 3일 자신의 포르치운콜라에서 죽음을 맞이하는데
사형수들의 처형장이며 무덤인 '지옥의 언덕'이라는 그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한다.
1228년. 교황 그레고리오 9세는 프란치스코를 성인 품에 올리고 지옥의 언덕을 강복하여
'천국의 언덕'이라 부르도록 명하고, 그곳에 성당을 지어
1230년. 성인의 유해는 이곳으로 옮겨져 지하에 모셔져 있다.
단순,담백,정갈한 색과 디자인의 성 프란치스코 성당.
현재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의 본원이다.
고딕식 회랑.
아름다운 그림으로 가득찬 성당 안의 그림들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치마부에의 '성모 마리아와 성 프란치스코', 로렌제띠의 '석양의 성모'...
2층의 지오또의 청빈, 정결, 순명을 나타내는 프란치스코회의 영성과
28장의 프란치스코 생애와 일화에 관한 유명한 프레스코화에 대한 설명들.
아래층 입구
성당 안뜰
교황 시스토 4세 정원
2층 성당을 나오는 출구.
파스텔톤의 아름다운 색감의 그림들로 가득차고,
가장 오래되었다는 스테인드글라스화가 인상적인 화려한 내부
사진으로 남길 수 없어 매우 아쉽다.
그래서 성물방에서 한국어로 된 아씨시 책자를 발견하여 샀다.
T는 타우 십자가로 불리는 것으로, 구원을 상징하며
프란치스코 성인이 sign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전쟁에 패하고 돌아오는 프란치스코.
고통과 시련과 상처는 늘 구원에 이르는 길이었음을 우리는 늘 나중에 깨닫는다.
가난은 곧 나눔.
내 손이 비어 있어 있어야만 채워 주실 수 있는 것.
성 프란치스코 성당을 나와서
오래된 집들 사이로
아씨시의 오래된 골목길을 걷는다.
가로등도 아름답다.
오래된 성벽도 그대로..
성 프란치스코 길
성물방이 줄지어 있으나
들어가지는 못하고
발걸음이 절로 멈추어 선다.
최근에 지은 집이 300년쯤 된다나?
재건축, 재개발로 아파트로 가득 들어찬 우리나라를 생각하니 우울하다.
아씨시 광장
멀리 보이는 성 루피노 두오모(주교좌) 성당
기원전 1세기경의 그리스 미네르바 신전이었던 곳.
지금은 성모 마리아 성당.
종탑의 모습은 거의 흡사하다.
* 누오바(Nuova) 성당 - 프란치스코 생가
1615년. 성 프란치스코가 살았던 집 터 위에 성당이 세워졌다.
'피에트로 베르나르도네'(성 프란치스코의 아버지)의 문패가 달려있다.
* 성 글라라 성당
성녀 클라라(Chiara)는 귀족 집안의 딸로 18세 때 우연히 프란치스코 성인의 설교를 듣고 감화되어
프란치스코 성인을 따르게 되었다.
1212년.머리를 자르고 그리스도께 봉헌하기로 결심, 프란치스코회의 제2회인 클라라회를 창설하게 된다.
또한 세속에서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따르려는 사람들을 위해 프란치스코 제3회도 설립되었다.
우리 부부도 성지순례이후 프란치스코의 삶에 영향을 받아 제3회를 고민하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과 매우 흡사한 분위기.
성당 내부에는 치마부에와 지오또의 영향을 받은 화가들의 작품이 있으며,
다미아노 성당의 십가가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
프란치스코 성인과 클라라 성녀가 입었던 수도복.
클라라 성녀가 만들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성당에서 내려다 본 전경.
성 클라라 성당을 내려와 아름다운 아씨시를 떠나 피렌체로 향한다.
피렌체 도착후 현지 식당에서 저녁식사.
리조토,그리고 쇠고기굴라쉬와 샐러드. 후식은 과일.
어느새 성지순례가 막바지. 단 하루를 남겨놓았을 뿐이다.
길게 느껴졌던 시간들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Star Hotel.